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내 이름으로 불리는 순간이 그리웠다

by eungaon 2025. 4. 23.

40대 여성 사진

"엄마, 여보, 아줌마... 그 안에 나는 있었지만, 없기도 했다."


“엄마”라는 말은 분명 따뜻한데, 이상하게 자꾸 잊혀져요

“엄마~ 이거 좀 봐줘!”
“여보, 이따 장 좀 봐줘.”
“아줌마! 여기요!”

하루에도 수십 번, 나를 부르는 목소리들이 있어요.
그 말 속엔 애정도 있고, 필요도 있고, 또 일도 있죠.

근데 어느 날,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.
‘나는 오늘, 내 이름으로 불린 적이 있었나?’

남편은 결혼하고 나서 한참을 "자기야"라고 불렀어요.
그 ‘자기’는 이름보다 더 달달하게 느껴졌던 말이죠.
근데 아이가 생기고 나선 그 말도, 자연스럽게 "여보"로 바뀌었어요.
정이 없다는 건 아닌데,
이름을 부르지 않는 사이,
어딘가 나라는 사람이 조금씩 흐릿해진 것 같았어요.

언젠가 병원 예약을 하려는데, 습관처럼 “김유진 엄마예요”라고 말했죠.
간호사가 묻더라고요.
“환자 보호자 성함이요.”
잠깐 멈칫했어요.
‘아, 내 이름… 뭐더라’ 하고.

정말로 생각이 안 나서가 아니라,
그 짧은 순간, 내 이름을 직접 말하는 게 낯설었던 거예요.
그 사실이, 이상하게 마음을 콕 찔렀어요.
아프진 않은데, 서늘했달까요.


“지현아”라는 말에 울컥했던 날

“지현아, 잘 지내?”
진짜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그렇게 불렀어요.
그 한마디에… 참 이상하죠, 가슴이 먹먹해졌어요.

그냥 이름을 부른 건데도
어릴 적 나를, 대학교 때 웃던 나를,
그 시절의 공기와 기억들이 한꺼번에 몰려왔어요.
기억 속에 잠들어 있던 내가
그 이름 하나로 다시 살아난 것 같았어요.

그날 친구랑 카페에서 커피 한 잔 하면서 말했죠.

“나, 누가 이름 불러주는 게 이렇게 좋을 줄 몰랐어.
요즘은 그냥, ‘엄마’, ‘여보’, ‘이모’ 그런 호칭 속에만 사는 느낌이야.
근데 그게 익숙해지니까,
내가 누군지 자꾸 잊어버리게 되더라.”

친구도 고개를 끄덕였어요.
“나도 그래.
나도 누군가 내 이름 불러주면 괜히 울컥해.”

그 순간,
우리 둘 다 말은 안 했지만, 마음속에선 같은 문장이 맴돌았을 거예요.
‘우리는 누구의 엄마이기 전에, 그냥 ‘지현이’고 ‘수진이’였는데.’


다시 내 이름으로 살아보는 연습

그날 이후로, 저는 작은 노트를 하나 꺼냈어요.
첫 장에 제 이름을 써봤어요.
“지현의 노트.”
어색하면서도 좋았어요.
마치 다시 나에게 말을 거는 기분이었달까요.

매일은 아니지만, 가끔 그 노트에
‘오늘 어떤 기분이었는지’
‘무슨 생각을 했는지’
‘뭘 먹고 싶었는지’
그런 걸 적어요.
누군가 보기엔 사소한 일기지만,
저한텐 내 이름으로 살아가는 하루의 조각들이에요.

가끔은 스스로를 이름으로 불러보기도 해요.
“지현아, 오늘 진짜 힘들었지?”
“그래도 수고했어, 지현아.”

웃기죠?
근데 진짜 신기하게도,
그 말 한마디에 눈물이 핑 돌 때가 있어요.
남들이 안아주지 않아도,
내가 내 마음을 알아주는 느낌이랄까.


이름은 존재고, 존재는 잊히면 안 되는 거니까

우린 늘 누군가를 위해 움직여요.
아이를 위해, 가족을 위해, 때로는 시댁을 위해…
그 속에서 나라는 사람은 점점 투명해지죠.
보이긴 해도, 뚜렷하진 않게.

하지만,
이름은 우리가 세상에 남긴 첫 번째 존재의 증거잖아요.
누군가 나를 “지현아”라고 불러줬을 때,
나는 그제야 ‘내가 여기 있구나’ 하고 느끼게 돼요.

그래서 요즘은
아들에게도 말해요.
“엄마도 이름 있어. 지현이야.”
아들은 웃으며 “지현이 엄마~” 하고 장난치지만,
그 말 한마디가 저한텐 선물처럼 느껴져요.

나는 지금도 엄마고, 아내고, 딸이고, 동네 아줌마지만
그 안에 분명히 ‘지현’이라는 한 사람이 살아 있어요.
그리고 그 사람을 자꾸 불러줘야,
잃어버리지 않아요.


그래서 오늘도, 내 이름을 부르며 하루를 마무리해요

지금, 이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
아이 방에서는 책장 넘기는 소리가 들리고
주방 싱크대엔 저녁 설거지가 덜 마른 채 놓여 있어요.

그럼에도, 저는 조용히 펜을 들어
노트에 오늘의 한 문장을 씁니다.
작지만 제 이름이 새겨진 페이지 위에.

“오늘도 잘 버텼다, 지현아. 참 잘했어.”

그렇게 저는
내 이름으로 하루를 닫고,
내 이름으로 다시 살아가는 연습을 합니다.